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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세계관입니다. 
* 설명충이 되어버린 판타지AU


 

Into the Divine 




 수도의 외곽은 선을 그은 듯 짙은 녹음과 찌든 황무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영 삭막해 보일지언정 하늘을 찌를 모양으로 세워진 국왕성이 보일 정도로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수도의 바깥은 황무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까. 물론 왕국의 상황이 지금과 똑같이 돌아간다면 수년 내에 경계 안쪽의 황무지는 곧 그 풀숲과 나무 군락들도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눈이 편한 초록이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하기로 했다.

 학원 입학을 위해 처음으로 상경한 날 이후로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명색이 왕국의 수도인데,  군사시설과 귀족들의 저택으로 양분되어 있는 중심지에서 채 두시간도 걸리지 않아 보이는 풍경은 화전의 흔적들과 낙후된 농가들 그리고 그마저도 버려져 잡초만 무성한 마른 땅들이었다. 분지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수도권 인구 제한은 태초부터 그랬대도 모두가 믿을 만큼 당연한 법령이었다. 사람이 적으니 이리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정 장소가 여기가 맞을 텐데. 해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한번 더 살피면서 얀이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뭐, 언제 출발한대도 오늘내일은 저 산 속에서 야영하게 될 테지만 그래도 날이 밝을 때 출발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테니까. 간단하게 꾸린 짐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검집을 톡톡 두드리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만다. 페어라고 붙여준 사람이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전투반 학생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마법반이라는 이야기인데 얀은 그쪽 사람들과는 좋은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시작부터 지각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다.

 긴긴 학원생활을 끝낼 마지막 과제다. 얀은 졸업 대상자였고, 오늘 시작하는 것은 졸업시험을 담당할 임무였다. 아마도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내. 기타 수속을 밟는 것은 못해도 한달 후에는 끝이 늘 테고 그때는 정말로 학생 신분을 벗고 자잘한 마물 토벌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대하는 전선에 가게 될 것이다. 지난 6년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최우선으로 고향의 어머니를 수도에 데려올 참이었다. 학원 출신의 군인은 졸업만 한다면 하다못해 첫 임무에서 죽더라도 가족을 국가에서 부양해준다.  얀은 롬 제국과 인접한 국경 근처의 작은 동네 출신이었고, 롬의 사막지대와 가까운데다 인구가 적다는 고향마을의 특성은 마나폭풍의 발생위험이 높다는 소리와 맥을 같이했다. 언제 마을이 통채로 사라질지 모르는 현실에서 신문도 보지 못하는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달이 오는 편지를 보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빨리 졸업을 해서 어머니를 데려오자. 무슨 임무를 하든 출발하기 전에 형식적으로 쓰게 되는 유언장에도 그리 적은 참이다. 적어도 수도는 한순간의 폭풍 따위에 휩쓸릴 일은 없을 테니. 지금 만날 자신의 페어도 비슷한 류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골이 난 것이 조금은 풀리는 듯도 하다. 그래, 피차 힘든 처지끼리 빡빡하게 굴면 쓰나. 너그럽게 기다려야지. 다시 눈 앞의 짐보따리와 거기 꽂힌 검집에 집중한다.

  "뭐야, 너야?"

 검집을 쓸어보던 손이 들려오는 말소리에 가려 멎었다. 바람이 불었고, 바닥에선 작게 흙먼지가 일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아니, 학원 사람 몇이나 된다고. 당연히 들어봤겠지. 그런데 왠지 불안한걸. 마법반 애들 중에 친한 애가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니. 머릿속의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왜 하필 얘야?

  "마법반 광역마법부서 루시아 아마디스. 끝까지 얼굴을 봐야 한다니 누가 짠 조야."

 마찬가지로 얀을 알아본 건지 영 삐뚤은 표정의 상대방이 임무 시작을 알리듯 관등 성명을 대었다.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저러는 모습까지 낯설고 껄끄러운 상대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눈에 확 들어오던 분홍색 머리가 매마른 주변풍경에 가려 함께 빛이 바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선을 올린다. 그리 크지 않은 키, 뚱하게 얀을 바라보는 붉은 눈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한숨부터 먼저 튀어나온다. 왜 하필 이 사람인가. 작게 인상을 쓰다가 일어섰다.

  "미시 국립 군사학원 전투반 대인전투부서 얀 판 베트레이다.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아마디스?"

 옷을 대충 털고 짐을 등에 지며 툭 물으면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 출발할 땐 정시였는데.

  "당연히 도착이 정시여야 하는 거 아닌가? 보고서에 쓰면 감점요인이야, 아마디스."
  "거 참 쪼잔하네. 그래서 적으시게?"

 적반하장이다. 가벼운 차림에 거진 빈 손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며 먼저 걸음을 떼었다. 이번 임무는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기엔 건너가야 할 산이 너무 크게 느껴졌지만.

  "길 알아?"

 루시아가 물었다. 나 임무지 안 보고 왔어, 가히 대미를 장식할만한 말이 이어졌을 때 얀은 진심으로 제가 졸업할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했다.


**

 
 미시 왕국은 대륙에 자리잡은 삼국 중에 가장 불리한 요건을 가진 나라였다. 롬 제국처럼 무지막지하게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이스탄 왕국처럼 풍부한 마법인구를 가진 것도 아니다. 개국 이후 600년. 물적 자원도, 인적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꿈을 꾸는 방법은 약탈이었기에 거대한 제국보다는 비슷한 처지의 무역국가인 이스탄을 먼저 친 것은 다소 급작스러웠을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지부진한 찌르고 빠지기 식의 전투는 아직까지 큰 마찰이라 부르기에는 마땅치 않았으나 간보기 후에는 본격적인 행동이 뒤따를 테다. 나라는 이미 전쟁을 치를 준비를 끝냈고 그에 따른 비상체재에 돌입해 있었다. 얀으로서는 기다리던 일이기도 했다. 비 기득권자가 미시에서 출세하는 길은 군인이 되는 것 뿐이다. 능력은 가장 확실한 자산이다. 얀은 이 말을 믿고 싶었다.

 2년 전 루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를 직접 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싫었다. 귀족과 평민이 나눠져 있는 현실에서는 어떤 특수성을 가졌든 간에 노력과 능력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마물 토벌 임무에 한번이라도 나간 적이 있을까. 이번 임무 내내 짐덩어리일 것 같은데. 물론 시험을 통과해왔으니 졸업대상자가 된 거겠지만 얀은 전투반과 마법반의 진급시험이 다른지 어떤지도 몰랐기 때문에 속으로 그를 까내리는 건 섣부르고도 쉬웠다. 얀에게 루시아는 곱게 자라 약속된 기득권을 얻을 도련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배경에 덧붙여진 하나의 이점일 뿐이다. 당장 임무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저런데 누가 부정하겠는가.

 한동안은 풀을 쳐내는 칼소리와 그에 따르는 사박거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이 다닐 일이 없기에 풀숲과 덩굴이 가득 찬 흙산은 자연상태 그대로다. 만들어진 길로 가기에는 임무지가 평소의 그것보다 훨씬 멀었기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눈 앞을 가로막는 덩굴과 거미줄을 짜증스럽게 쳐내며 뒤를 돌아본다. 벨 때의 각도는 아래서 위로 45도. 손에 쥔 단도는 다시 넣어보았자 금새 꺼내야 할 것 같아 고쳐 쥔 채 그대로 두고서다. 뒤따라오는 모습은, 관찰자의 감정이 다분히 섞여서 그렇겠지만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벌써 지친 건 아니지?"

 근 세 시간 만에 둘 사이에서 처음으로 터진 말이었다. 루시아를 살피는 얀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법을 쓰는 사람들의 체력이 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저리 대놓고 싫은 표정이면 앞서서 고생하는 자신은 뭐가 되느냐는 생각을 잠시 한다. 일거수 일투족이 이리 거슬린다니 역시 이 페어는 망했다.

  "...짐 줘."

 지금 멈추는 건 위험했다. 적어도 누군가가 묫자리로 봐둔 공터정도는 나와야 야영을 할 수 있다. 한시간쯤 늦게 출발한 게 큰 차이는 아니었겠지만 해가 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으니.

  "아마디스."

 손을 내밀며 재차 말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얀이 예상했던 대로 별 생각 없이 제 가방을 내리던 손이 빠르게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접힌 종이를 제 주머니로 옮겨넣고는 그다지 묵직하지 않은 짐을 건네었다. 편지 같은 건가.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받아든다.

  "산 넘어가 본 적 있어?"

 아니. 루시아의 짧은 대답 덕에 모처럼 나온 말은 금새 침묵으로 회귀할 판이었다. 

  "우습게 보여?"

 불만이 아니라 정말로 힘겨운 거였는지, 옆의 나무에 기대선 채 루시아가 덧붙였다. 잠시 멈춰섰다. 눈을 마주치자 보란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역시 재수가 없다. 2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무슨 말로 시비를 받아도 제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얀은 짜증스럽게 눈치만 줄 뿐이었다.

  "밤새 벌레한테 뜯기고 싶진 않거든, 아마디스. 업고 뛰어주길 바래?"
  "미쳤어?"
  "그럴 줄 알았다."

 그리 죽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마법으로 불이라도 켜달라고 해야 하나. 그만큼 쓸데없는 기력소모가 없을 테지만. 어둑한 기가 한층 더해진다. 정말로 밤새 풀벌레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며 빽빽한 덩굴을 쳐내면, 기적처럼 나무가 빈 공터가 보였다. 뒤에서 안도하는 듯한 한숨이 들린다. 루시아는 지쳤고, 얀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감돌았던 형태없는 마찰 때문이었을지 단순 육체적인 노동 때문이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


 공터는 예상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묘지 자리였다. 산에다가 사람을 묻는 건 동양 쪽에서 온 전통이라고 했던가. 원세계의 역사에 대해 배웠던 것을 짧게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도의 공동묘지가 다 수용하지 못하는 시신들, 주로 수도 외곽에 무단으로 거주하는 화전민들일 테다. 그들은 산 말고는 묻을 곳이 없다. 사유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푸릇하게 싹이 오른 봉분들은 규칙이 없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무허가 쓰레기장과 다를 것이 없다. 쌓아올리지 않은 편편한 땅 속에도 몇 명이 묻혔을 지 모를 일이었다.

  "박스가 없다고?"

 루시아가 재차 물었다. 기대앉은 동산이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걸 알기는 하는 건지, 쇼파에 앉은 듯 편한 모양새다.

  "없다니까. 있어도 못 쓰는 걸 왜 가지고 다녀."

 못 쓴다, 얀이 말하면 그제야 이해했는지 미끄러져 내려와 풀숲에 폭 앉아 말한다.

  "그럼 어디서 자는데."
  "여기."
  "뭐?"

 박스는 마나를 주입하면 속에 압축된 공간이 펼쳐지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법도구다. 주로 군용 캠핑의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은 상기했듯이 마나를 운용하지 못하면 개시조차 못 하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이었다. 옆 나라인 이스탄에는 박스용 마나주입시설이 곳곳에 있다고 하지만 미시는 그러한 기반체계가 잘 되어있지 않았고, 이번 임무처럼 산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전투반 학생들은 생각보다 더 나가는 그 무게 때문에 어지간하면 들고다니지 않는 물건이다. 물론 전투반의 경우니 그럴 테고 얀은 루시아가 저걸 묻는 것이 더 의아해졌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왜 안 들고 왔다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한두번 해보는 일도 아닐 텐데.

  "야영 해 본 적 없어?"
  "있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얼척이 날아가는 것도 잠시,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전투반의 승급시험은 주로 근방의 마물을 토벌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일반 생명체가 대기중의 마나에 의해 돌연변이가 된 것을 마물이라 부르는데, 전투 중 사망자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일 만큼 위험했기 때문에 다음 학년으로의 승급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당장 입학 동기 중에 졸업대상자는 얀 뿐이었고 다른 학년에라도 남은 사람은 총원 50명 중 10명 남짓이다. 그래봤자 학원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넘쳐났고, 전투반의 인원은 어렵지 않게 매꿔지곤 했기에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학원실정이었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귀하다는 마법인구라면? 항상 인원부족으로 고생하는 마법반이라면?

  "...마법반은 승급시험이 뭔데?"

 대충 주변에서 꺾거나 주워모은 나뭇가지들을 한 곳에 털어두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목소리가 떨렸다. 다른 세상 사람들이잖아, 전투반 사람들끼리 늘상 하는 말이 상대방의 얼굴과 겹치듯 들려왔다. 귀한 인재들이라 이거지. 우리는 소모품이고. 뭘 묻냐는 듯 마주보던 루시아가 이윽고 뱉듯이 말했다.

  "마법회로 점검."

 신입생 시절 옆 자리에 앉아 함께 이론 수업을 듣던 동기들의 얼굴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명부의 이름들이 하나씩 떠오르면 당장 주먹을 들어 눈앞의 샌님을 한 대 쳐 줘야 옳은 일일 것만 같은 답이었다. 고작 그거야? 물론 잘못된 것은 학원의 방침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사람 하나에게 이토록 적개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또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말하듯 뻔뻔한 저 표정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우리는 목숨걸고 하는 일이거든, 아마디스."

 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실소가 섞인 한마디였다.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걸까. 별 다른 기색 없이 빤히 마주보던 루시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너네가 마법을 못 쓰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루시아의 얼굴에 얀의 주먹이 꽂히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필기 성적 A+, 실습 성적 A+, 동료평가 A+. 진급에 실패한 적이 한번도 없는 우수한 학생. 얀의 평가서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적혔던 문구였다. 그 아래의 한 줄과 함께.

  고집이 세며 의견이 맞지 않을 시 폭력성을 보일 때가 있음.

 물론 같은 편에게 그렇지 않는다면 저런 특이사항 정도는 군인이 되는 데 아무런 흠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들어오는 제재나 훈계는 없었지만, 얀은 그 문구에 대해 우려하는 어머니의 말을 매달 편지 말미에서 꾸역꾸역 읽어야만 했다. 저 문장이 저에게 있어 오점이라는 것은 그 때문에 인지했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은 루시아 덕에 알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폭력성이라는 말이 추가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조금 더 전으로 올라간다. 신입생 명단에 쓰인 이름을 보기 전부터도 얀은 루시아를 알고 있었다. 별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물과 기름마냥 섞이지 않고 지내는 마법반 교실로 급하게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이상한 눈으로 저를 보는 얼굴들 사이로, 명찰따위 없어도 한 눈에 알아볼 법한 그 분홍 머리카락을, 잊을 리가 없이 꼭 같은 붉은 눈을 가진 얼굴을 찾아 잡고 다짜고짜 물은 적이 있었다.

   - 왜 그랬어.

 분명 루시아와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둘이 있는 상황은 익숙했다. 이어지는 말들도 그러했고,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시의 얀은 아무런 기시감도,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창가 자리, 잡힌 옷깃이 구겨지며 생기는 주름들. 올려다보는 시선.

  - 블레이크는 어떻게 된 건데!

 주변 그 무엇도 그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긁는 소리를 지르는 얀과 그를 올려다보는 루시아까지, 그 이후에 살벌하게 오간 대화는 둘 그 각자로서의 첫만남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시끄러워, 베트레이. 걔가 말 안 했어? 시선을 피하고서 루시아가 물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이러는 거야.

 결혼한다며. 그 말은 들었지, 하지만 믿을 말이어야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는 거 안 보여. 

  - 너랑은 상관없잖아.

 얀은 견딜 수가 없었던 말이었다. 무심한 듯 뱉어지는 루시아의 목소리는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도 있었던 얀의 눈을 가린다. 상소리를 내지르며 상대를 밀어버렸던 것도, 하필이면 그 장소가 마법반 교실이었던 것도, 쓰러진 사람이 갓 입학한, 여직 회로가 불안정한 루시아였다는 것까지. 모든 것의 합작으로 빚은 결과물이 지금 이 상황이었고 평가서의 한문장은 그에 대한 부산물 정도가 되겠다. 밀어 넘어뜨린 그 아래에서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렴 누구 얼굴인데 잊겠는가.

  - 블레이크.

 잠시 멍하게 이름을 중얼거리던 얀을 올려보며 루시아는 그리 말했었다. 꿈 깨,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통성명도 하기 전의 첫 만남에서 얀에게는 그 말을 하는 루시아의 모습만이 남았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라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표정.


**


 한 쪽으로 크게 돌아갔던 고개가 작게 고인 피를 뱉으며 돌아왔다. 2년 전의 그때와 꼭 같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은 얀의 앞에는 루시아가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손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보이지 않길 바라며 숨긴다. 미안,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입을 열고 그를 보았을 땐 여전히 밑에 깔려 있는 루시아의 시선이 제가 아닌 그 너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곧바로 쏟아지는 비속어들이 없었다는 걸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괜히 빈정이 상했다. 무시하고 있는 건가.

  "왠일로 아무소리 안 한대."
  "야."
  "...치려고 한 건 아니고..."
  "띨띨아 저거."

 맞지 않는 시선 속 루시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얀은 역시 어머니 말대로 이런 행동은 자신이 백번 잘못하는 것을 되새겼다. 그 마음을 가지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많이 아팠어? 나 약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미..."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뒤를 보라고!"
  "?"

 아까부터 맞지 않았던 루시아의 시선은 눈을 피한 게 아니라 그 뒤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이제는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손짓이 저를 깔고 있는 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바닥의 풀을 움키고 있다. 뒤에서부터 묵직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그제서야 얀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청각이 열리면서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느껴지는 그런 감각들이다. 등골이 싸하게 식는다고 하면 맞을까.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완연히 어두워져 윤곽만이 남은 주변 풍경의 끝에는.

  "...뭐야, 마물 경보같은 거 들은 적 없어."

 다소 멍청한 목소리가 헛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증명하듯 섬짓하게 빛나는 안광과, 원래는 무슨 모습이었을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기괴하게 비틀린 몸체가 그것은 마물이라는 것을 내보이고 있다. 제 몸 세개를 합쳐도 안 될 정도의 덩치다. 맷돼지일까? 이 산에 사는 동물 중에 저만큼 크게 변할 동물이 있나? 생각할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뛰어오른다. 내리찍을 듯이.

  "피해!"

 돌아볼 시간까지는 없다. 몸을 굴리듯 옆으로 들었던 옆 자리에 앞발에 채인 자국이 깊게 패였다. 말이 나온 직후의 일이었다. 급하게 일어선 몸이 발을 딛고 크게 물러섰다. 제대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얀이 매번 토벌하던 것들과는 달랐다. 저만큼 큰 게 마물화를 끝낼 때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아무리 인적이 없는 곳이어도 여기는 수도로 바로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다시 뛰어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아 거리를 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잘 피했는지 저와 마찬가지로 등을 보이지 않고 물러서는 루시아가 보였고, 그런 루시아의 뒷쪽으로 쌓아뒀던 장작과 짐들이 보인다. 이를 악물었다. 얀이 지금 가진 것은 길을 낼 때 썼던 단도 하나 뿐이다. 

 마나가 장악한 몸체는 강화되고 변형되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상처도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를 가르는 데에는 훈련받은 투사가 필요했다. 보통은 학생들 선에서 정리가 끝나지만 그때도 최소 3인이 한 조를 이루었고, 더하여 그 때 상대했던 것들 중에 지금 얀이 마주하고 있는 것만큼 완벽하게 마물화된 개체는 극소수였다.
 잡을 수 있을까. 사실 얀은 루시아와 함께 어찌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었고, 그러니까 해결할 사람도 본인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다. 발에 채이는 주먹만한 돌덩이를 냅다 잡아던졌다. 이쪽이야, 말하듯이 팔을 머리 위로 크게 흔들고는 소리를 지른다. 처음 달려든 후엔 잠시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몸이 날쌔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은 얀 쪽으로 몸을 틀었다. 푸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날이 선 단도를 고쳐 잡고, 잠깐이라도 틈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을지 빠르게 눈을 굴린다. 이내 포기해야 했다. 이걸론 어림도 없어. 마물의 어깨 저 너머에 있는 제 짐과 그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검집을 확인했다. 거진 그쪽까지 간 루시아도 함께.

  "내 칼 던져!"

 시선을 다시 마물의 안광으로 옮기면서,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면서 얀이 소리지르듯 불렀다. 마물도 마찬가지로 크게 도약한다. 저 뿔에 치이면 최소 닭꼬지 꼴이 되지 않을까, 맥락없는 생각이 짧게 스쳐갔다. 한 번이야. 손에 쥔 짧은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몸체에 찔러넣었다. 제대로 꽂히지도 않는다. 잡은 팔으로 지탱하고, 마찬가지로 뛰었던 힘의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발을 내딛었다. 다른 손으로 등께의 털을 움켜잡기가 무섭게 날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답이 없네, 날아간 단도를 다시 보급받기 위해 써야 할 사유서를 잠시 떠올릴 시간도 없이 힘을 주어 매달린다. 정신없이 들썩이는 등판에, 아니 그를 잡은 본인의 팔에 두어번 얼굴을 얻어맞고 나서야 제대로 올라탈 수 있었다. 사자 위에 떨어진 토끼정도가 되려나. 올라탔다는 말도 어폐였다. 그저 매달려서 있는대로 흔들리는 통에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고작이다. 얀이 있던 곳까지 달음박질을 치던 마물이 돌진하던 길의 목표물이 사라진 것을 알았는지 잠시 멈췄다.

  "칼, 던지라고, 아마디스!"

 쿵, 크게 앞발을 구르는 통에 떨어져내릴 뻔 한 것을 다시 균형을 잡으며 몸을 뒤로 틀었다. 던지기엔 거리가 꽤 멀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일 경우에.

  "...없잖아, 멍청아!"

 방향을 트는 통에 앞 말이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못 들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루시아가 재차 소리친다.

  "검집밖에 없다고!"
  "가벼우니까 그냥 던져!"

 전달을 위해 고래고래 내지르지만 얀에게는 올라탄 몸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떨어트리려는 건지, 공터 끄트머리의 봉분에 대고 제 몸을 크게 부딪치는 통에 덥수룩한 털을 잡은 손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어야 했다. 튕겨나가기만 해도 최소 중상일 것이다. 정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군.

  "빨리, 해!"

 재차 독촉한다. 몸을 넓게 펴서 기어오른 손이 마물의 목덜미로 예상되는 부위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다. 루시아가 얀의 검집을 집어들긴 한 모양이었다. 받을 수 있어, 내 검이니까. 말로 낼 힘은 없어 보라는 듯 한 손을 떼어 들었다. 쿵, 두 번째로 흔들릴 때는 정말 반쯤 몸이 반쯤 들렸던 통에 얀은 진심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했다.

  "실프!"

 루시아가 잡았던 검집을 공중에 놓아주듯 손을 펼쳤다. 마법 쓰는 애들은 왜 저런 걸 굳이 입으로 말하는지, 얀은 항상 궁금했다. 마나 운용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알고 있었지만 원소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미시 내에선 루시아와 같은 광역마법부 사람들밖에 없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스쳐갈 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머리카락 새를 살짝 스쳐간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의 미풍이었다. 아니 정신이 없어서 그리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약한 바람이라 느낀 것과는 다르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꽂혀들어오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손 끝을 스쳐 지나가려는 것을 뻗어 잡으려던 찰나 마법이 풀리듯 날아가던 검집이 허공에서 폭 떨어져내렸다. 딱 거기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목표였다는 듯이. 딱 그 팔의 길이정도인 검집이 가볍게 내려섰다.

  "나 죽이려고 그러냐!"

 진작 던질 것이지, 다른 생각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말을 짜증스럽게 뱉으며 고쳐 잡았다. 양 팔을 다 뗄 수 있을까,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면서도 확신이 없다. 발도에는 집중이 필요하다. 설사 재차 들이박으려는지 뒤로 물러서는 마물의 몸 위라고 하더라도 그랬다. 얀이 검을 쥐는 왼손이 검집을 잡고있던 손과 엇갈려 그 위를 쓸어올린다. 다시 움직이기 전에 뽑아야 해. 손이 지나가는 검정 겉면 위로 푸르스름한 문자들이 나타난다. 원래라면 검병이 꽃혀 있어야 할 빈 자리에서 무언가를 움키듯이 쥐었다. 마물의 안광과 같은 푸른 빛이 검집 안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는 듯 그 끝을 잇는다. 뽑기만 하면 돼. 조금만 더. 올라탄 다리에 힘을 주어 조이며 찔러넣을 목덜미를 내려다본다.
 물론 마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박치기를 할 준비를 마쳤는지 다시 크게 앞발을 구르는 통에 몸이 크게 뒤로 꺾인 얀이 입새로 쌍욕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시달린 몸 이곳저곳이 쑤셨다. 허리가 저려왔지만 잠시라도 넋을 놓을 수가 없어 부릅뜬 눈에 힘을 주었다.

  "잠시만 멈출 수 있어?"

 도움요청은, 특히나 루시아에게의 도움요청은 영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저 둔덕에 다시 몸을 갖다 박을 적에도 버티며 올라타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검을 뽑을 수가 없다. 쾅. 들었던 앞발이 땅으로 착지한다. 몸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재차 물었다.

  "아마디스!"
  "노움!"

 루시아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어느새 바로 조금 뒤의 나무까지 와 기대 선 시선이 마물의 발치를 향하고 있다. 뻗은 손은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리라. 어두워서 얀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흔들림이 급하게 멈춘 걸로 봐서는 땅에 마물의 발끝이 묻혔거나 그 비슷한 류의 마법인 것 같았다.

  "오래 못 버텨, 빨리 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 좌표를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이 힘든지 기대선 얼굴이 힘겨워 보였다. 그리고 루시아의 말을 증명하듯 이내 마물의 몸이 크게 들썩인다.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걸 봐서는 지금 이 괴물의 입장에선 올라타고 있는 얀보다도 제 발을 묶은 힘의 주인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인 모양이었다.

  "잠깐이면 돼."

 아직 형체가 없이 손에 쥐여져있는 손잡이뿐이었다. 검집의 푸른 빛은 이제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얀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발도는 한 번이다. 교육받을 적에 딱지가 듣도록 들었던 말을 되새기며, 검집의 끝에서 벗어난 왼팔이 빠르게, 그리고 크게. 마지막으로 더없이 고요하게 마물의 목덜미를 가로질러 베었다. 아니, 손에 쥐여져 나온 푸른 빛이 그 어둠을 가른다. 빛무리를 없애지 못해 검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모양새의 그것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마물이 크게 요동친다. 오른손의 검집을 빼어잡듯 이로 물고는 푸른 빛을 양 손으로 다잡았다. 베고 나온 그것을 크게 위로 든다. 속박이 풀린 듯 몸을 떨던 마물이 앞발을 구르며 크게 위로 뛰는 그 시점에 양 손이 잡은 푸른 검이 베어낸 그 장소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얀의 몸도 더 붙지 못하고 연을 날리듯 튕겨져나온다. 잡고 있지 못하고 놓치자마자 겨우 검의 모양을 잡았던 푸른 빛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마물이 앞발을 꿇는다.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른 얀의 몸은 바로 그 다음 순간 공터의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에 크게 박았다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부러졌다. 숨을 쉬기 힘들 때 늘상 그렇듯이 죽을 듯 쿨럭이는 소리가 몇 번 울린다. 양쪽 중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그랬다.

 예고없는 침묵이 공터를 내리눌렀다.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듯이 무거운 공기만이 가득 찰 뿐 나무도 풀밭도 멈추어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루시아는 숨을 죽였다. 얀한테로 달려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였다면 아직 살아있는 마물 쪽이 우선이라고 고함을 질렀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잠깐 빛났던 덕분인지 다시 캄캄하기만 한 시야에 어두운 덩어리가 잡힌다. 잘은 떨림일지라도 괴물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다가갔다. 용감해서라거나 다른 이유가 아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잘 가늠도 되지 않는 곳의 좌표를 잡는 데는 지나치게 많은 마나가 필요했다. 방금 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것이지, 벌써부터 몸이 놀랐다는 것을 전해오듯 온 내장이 조여오는 기분에 루시아가 인상을 쓰며 멈추어 선다. 얀이 공격한 부위는 금방 알 수가 있다. 곧 죽을 주인을 떠나려는 것인지, 상처부위에서 슬금슬금 흘러나오는 푸른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댄다. 이대로 있어도 죽을 것 같았지만 저기 쓰러져 있는 제 페어라면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을 테다. 루시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살라만드라. 손 끝에서, 아니 정확히는 손이 닿인 곳에서 불꽃이 일었다. 흘러나오던 기체로 옮겨붙는다. 동조하듯이, 푸른 안개는 스며나오던 모습 그대로 타고 올라가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였던, 동물이었던 무언가의 몸을 재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물의 몸은 그렇게 연소했다. 주변의 것들에는 아무런 위해도 없이, 흔적조차도 없이 딱 그 덩어리 하나만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는 검집 속에서 얀이 뽑아냈던 검도, 마물의 안광도, 제가 쓰는 마법도 그렇다. 그건 마나라 불리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대기중에 떠돌아다니는 흔하디 흔한 것. 하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생명체의 몸에만 깃드는 푸른 무언가. 손을 거둔 루시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에 잠식된 몸은 저리 되는 것일까. 그 죽음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오염되어 통제력을 잃은 몸은 버림받고, 타인의 힘에 반응하여 흔적도 없이 스러진다. 말로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최후는 거진 그랬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마법인구든, 얀과 같이 후천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얻은 사람들이건 간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손이 떨리고 있다. 다른 손으로 내리누르듯 잡고는 시선을 돌린다. 이런 걸로 죽을 리가 없다는 거 잘 알아. 감히 확신을 하며 그제서야 얀에게 다가갔다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몸을 확인하고는 긴장이 풀렸는지 옆에 푹 주저앉아버렸다. 어찌해야 한담. 불이라도 피워야 하나. 체온 유지가 우선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저 팔은 부러진 게 아닐까. 응급 처치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런 건 루시아가 아니라 지금 엎어져 자는지 기절했는지 모를 사람이 늘상 해왔을 일들이었다. 눈으로도 몇번인가 확인한 적이 있었지. 잠시 예전 일들을 떠올리다가, 그래도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나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아 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얘는 왜 혼자 달려들었다가 혼자 나가떨어지고 난리야. 의미없는 트집도 한번. 역시 불을 피워야 하나? 간단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리를 짚었다가 저 좋을 대로 조금은 어긋난 결론을 내렸다. 정말 가지가지 번거롭게 멍청한 녀석이다. 하고.


**


  "그럼 검 자체를 다 마나로 만들 수도 있겠네?"

 잠시 망설이던 손이 소년의 이마 위로 얹혔다. 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금발은 어두워질 시간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뛸 정도로 선명하다.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이 편안한지 눈까지 슬쩍 감았던 얀이 작게 웃어버렸다.

  "이런 데 왜이렇게 관심이 많아, 블레이크?"

 소년, 얀은 눈을 떴다. 시선이 올라간 끝에 보이는 얼굴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좀 궁금할 수도 있지, 하는.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비 마법인구인 사람들은 그 정도가 끝일 거야."

 얀이 손을 뻗었다. 블레이크의 뺨 근처로 가려던 것이 머쓱하게 흘러내려오는 분홍색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상대방이 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이 조심스럽게 쓸어내려본다. 무겁진 않을까, 베고 누운 다리가 걱정스러워 부러 목에 힘을 주었다가, 양쪽 다 꽤나 불편한 모양일 것임을 깨닫고 다시 편하게 머리를 뉘였다.

  "힘들게 사네. 마나라니 그런 건 가지고 태어나도 거절하고 싶은데 넌 왜그렇게 필사적이야?"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니까. 옆에 이스탄은 마법인구 살기엔 훨씬 좋대."
  "누가 마법사 말했어, 너 말이야."

 제가 말해놓고서 너무 노골적이라 생각한 건지 블레이크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쑥쓰러워서 그런 걸까. 수도 중심부의 밤은 조용했다. 군사시설은 정해진 시간에 소등과 취침하는 것을 어긴 적이 없었고 귀족가의 저택은 그 안의 소음을 밖으로 내보낼 만큼 얄팍하지 않다. 둘이 있는 곳은 그 바로 바깥의 정원이니 더더욱 그랬다.

  "걱정해주는 거야?"

 얀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니야. 곧바로 정색하는 표정은 이제 익숙했다. 굳은 척 하는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저를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도,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시선까지도.

  "꼭 하고싶은 일이 생겼어. 앞으론 더 바빠질 거야."

 블레이크. 이름을 부른다. 부르지 마, 닳아.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면, 이름 부르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의미없이 오가는 대화 속 생각만 해오던 말이 여전히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그냥 내어버릴까 하는 충동에도 자주 시달렸다. 국사학원 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바로 장교다. 그정도면 문제 없지 않을까. 미시에서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니까.

 블레이크.

 졸업을 하게 된다면. 입학한 그 순간부터 상상해온 장면에는 언제부턴가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제 앞에서 정말로 그렇냐는 듯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족집 막내딸. 얀이 아는 블레이크의 위치였다. 지금의 얀으로서는 이렇게 만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람. 그렇기에 수도 없이 현재가 아닌 미래를 예정하고 그려본다. 블레이크, 만약에 내가.
매번 손을 뻗기도 망설였던 그 얼굴에 키스하는 상상을 한다. 면사포를 걷고, 부케를 쥔 손을 덮어 마주잡을 것이다. 식을 주관하는 사제가 묻겠지, 평생 사랑하며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러면 자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힘주어 대답할 거였다. 내 모든 시간을 걸고 멩세합니다.
 이리 만날 때마다 무작정 그 손을 붙잡고 불현듯 튀어나갈 것만 같아 얀은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곤 했다. 만나고 있을 때만은 직전에 맡았던 임무도, 낮에 치뤄진 간결한 장례 절차도 다 잊고 저런 생각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상대방 그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


 느닷없는 폭우 덕분일까, 블레이크를 처음 만난 날은 여지껏 선명했다. 얀은 진급한지 얼마 되지 않아 팀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토벌이 아닌 탐색 임무를 맡았고, 순조롭게 수도 외곽 숲 속의 동굴 안쪽에서 마물화가 시작된 박쥐를 찾은 후 보고를 위해 돌아섰을 때였다.

  -거기 누구 있어?

 입구 쪽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얀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여직 침식 초반 단계라 마물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민간인은 위험할 수 있었다. 큰 소리를 내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동굴을 나서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무도 없어?

 재차 울리는 목소리에 반쯤 달리듯이 나간다. 들어갈 적엔 한참이었던 동굴이 이내 끝을 보였다. 기대앉은 인영에 다가서 급하게 어깨를 잡고 돌린다.

  "여기서 큰 소리 내면 안 돼."

 쫄딱 젖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젖어내린 이브닝드레스. 옷을 보니 서민 집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얀의 머릿속으로 급하게 생각이 흘러갔지만 이미 나온 말은 반말이었고, 상대방이 또래로 보여 그랬던 것이기에 돌아본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정정할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뭐야, 학원 사람이야?"

제복을 알아본 것인지 짧게 던지는 얼굴은 멀쩡해 보이는데, 이 날씨에 산을 올랐다니 단단히 미친 사람인 것도 같다. 죽기 딱 좋은 빗속이었다. 용케 동굴을 찾았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위험해. 내려가."
  "이 날씨에? 보이는 것만큼 멍청한 소리네."
  "뭐?"

 올라온 사람이 할 소리냐? 이상한 사람이야. 팔짱을 끼고 답하는 소리에 얀이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내쉬었다가, 차분하게 다시 설명했다.

  "안에 마물이 있어. 일반인은 접근금지야."

 마물이라는 소리에 팔짱을 끼고 돌아보고 있던 블레이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모두 그렇듯이 궁금해하는 걸까. 얀은 그런 태도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수가 없다.

  "봐도 돼?"
  "내려가."
  "깐깐하네. 어차피 잡으러 온 거 아닌가?"

 아니니까 빨리 가. 떠밀듯이 양 어깨를 붙잡고 동굴을 나선다. 비는 여전히 쏟아져내리고 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동굴과는 거리가 꽤 되었다.

  "내려가다 내가 잘못되면 어떡할 건데? 군인은 약자를 보호하는 게 의무 아니었던가-?"

 어차피 저도 내려가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마나가 변동을 부리는 것인지 예고도 없던 폭우라 그를 막을 도구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같이 비맞으며 내려가야 할 운명이었건만. 모두가 아는 사실을 얄밉게 말하는 통에 얀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툭 던졌다.

  "그럼 업고 내려가가주길 바래, 보호를 원하는 약자 씨?"
  "미쳤어?"
 
 대답은 간결했다.


** 


 온 몸이 쑤시는 감각에 얀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온 몸이 깨질 듯 아파서 몸을 일으키기가 힘이 든다. 몸에 덮여있던 담요가 흘러내린다. 오랜만에 그 애 꿈을 꾼 것 같아. 머리를 작게 짚으며 중얼거렸다. 쓸데없긴. 전날의 그 공터였다. 바로 조금 옆에는 파해쳐진 채 온통 붉은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무덤과 언덕이 보였다. 어두워서 몰랐지만 어지간히 날뛴 모양이다. 근처의 나무는 껍질이 다 뜯겨나간 채 허연 속을 드러내고 있다. 일순 느껴지는 오른팔의 둔탁한 통증에 잔뜩 인상을 쓰며 얀이 시선을 돌렸다. 꺼진지 두어시간은 된 것 같은 모닥불 터가 보인다. 날이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마디스."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습에 철렁하여 헉하는 소리로 속삭였다가, 급히 일어나려던 중에 담요가 걸리는 탓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긴장했던 몸이 풀리며 허탈한 숨을 나렸다. 얘는 정말 아무것도 안 들고 온 거야? 얀의 짐 속에 있었던 것을 같이 덮고 잔 모양이다. 등돌린 채 오르내리는 몸이 바로 옆에서 담요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날 보았던 마물은 흔적도 없다. 죽은 모양이지, 처리를 끝내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 얀 자신의 몸에 특별히 마물에게서 입은 상처가 없다는 것도.

  "으..."

 돌아누운 루시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정확한 좌표도 모른 채 마법을 썼을 전날 밤의 루시아를 생각했다. 얀은 마법을 쓰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온 몸의 혈에 마나가 다니는 통로를 생성하게 된다. 마나회로라고 부르는 그것은 성숙 정도에 따라 대기중의 마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내고, 준비가 된 길으로 들어선 마나는 심장을 거쳐 체내를 순환하며 그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일 준비를 끝낸다. 마나회로의 성숙도에 따라 마법 재사용 시간과 한번에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갈리는데, 마나회로는 몸 상태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성장에 따른 변화여도 다르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마법인구들은 몸이 약할 수밖에 없다. 마법회로가 잘 성숙되도록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 마법인구는 체내로 유입되는 마나를 제 것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어나간다. 지방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은 미시에서 마법 인구가 귀한 것은 이 이유가 크게 한몫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어제 한 짓은 제 체내의 마나를 계획성 없이 광범위하게 뿌려버린 거였다. 정확한 조준 없이 난사했다고 하면 맞을까. 한번에 대량의 정제된 마나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주인없이 날뛸 준비가 끝난 대기중의 마나다. 그 자체로 에너지 덩어리인 마나는 사용자의 몸에도 부담을 주는 양날의 검이었다. 언젠가의 그날처럼, 조심히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얀의 손길에 망설임이 어렸다. 이마를 따라 천천히 내려간 손끝이 뺨을 끝으로 떨어진다. 

 마지막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임무는 지나치리만큼 간결했다. 지정된 인물을 국경 너머로 무사히 데려다줄 것. 임무지라 위치된 곳은 이스탄 왕국 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미시는 이스탄과 전쟁을 준비중이었고, 따라서 적국이 될 곳에 가라는 것이 미심쩍기 그지없었으나 얀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지정 인물이라고 온 페어가 루시아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얀과 루시아가 받은 임무가 다를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지만 애써 외면한다.
 담요를 마저 루시아에게 다 덮어준 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삐걱대는 몸에 숨이 턱턱하니 막혀왔지만 어찌보면 익숙한 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저쪽 나무 아래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제 검집을 챙기며 얀이 생각했다. 지금이 몇 시지. 해 뜬 걸로 보면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두 시간 안에는 출발해야 했다. 둘 다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그때까진 재우기로 한다.

 까지 얀이 생각했을 때 루시아가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딱 눈을 마주친 통에 조금 놀라고 만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데는 더더욱.

  "좀 더 누워있지, 아마디-"
  "안녕."

 손까지 흔들며 다가오는 모양에 얀이 놀라 딸꾹질을 했다. 방금 쟤가 뭐라고 했지, 나 보고 손 흔들면서 안녕이라고 한 거야?

  "하루만에 땅꼬마가 됐네,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그랬어."
  "...?"

 설설 다가온 루시아가 얀이 들고 있던 검집을 자연스레 받아들고는 그것을 향해 말했다. 난 너 죽은 줄 알았다, 야. 하면서.

  "아마디스?"
  "...나무가 말을 하네."

 옆으로 슥 얀을 돌아보았다가, 별 놀란 기색도 없이 다시 검집을 툭툭 치며 말한다. 저것도 마물 아니야? 나무가 말을 하는데.
마법의 반동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어안이 벙벙함이 반, 불안함이 그 남은 것의 반, 그리고 나머지는 놀람으로 채워진 얀의 목소리가 공터를 작게 울렸다.

"정신 나갔어?"

 얀은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침잠이 많은 루시아에겐 일상적인 일이었다.


**


 산을 넘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얀이야 이정도 상황은 익숙했고 루시아도 곧잘 따라오는 편이였기 때문이다. 전부터도 생각보다 얌전한 애는 아니었지, 의외라는 생각 이전에 얀이 잠깐 떠올린다. 루시아가 군용 육포를 제외한 모든 마른 음식들을 맛없다고 밀어내는 바람에 얀은 제 몫의 육포를 다 넘기고 비스켓을 씹었다. 달라는 말은 일언도 하지 않았건만. 무슨 상관이냐는 루시아의 말에 그러다 쓰러진다고 제가 물려던 것을 먼저 건넨 건 얀이었고, 얀이 나만 고생한다는 식으로 툴툴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속을 까놓고 보면 그 불평을 한 당사자가 말도 나오기 전에 앞장섰던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얀도 그 사실을 알았으나 끊임없이 입으로 타박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다. 루시아도 굳이 그 문제를 찔러내진 않고서 당연한 것 아니냐는 태도로 일관했다. 식사할 때와 식수를 찾을 때 잠시 멈춘 것을 빼고는 정말 하루종일 걸었다. 다른 변수가 없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서로의 숨소리 말고 들은 것 중에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면 세번째 봉우리를 넘을 때쯤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을 때의 일일까.

  "생각보다 쉽게 죽던데, 그거."

 얀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얼굴은 보지 않는다. 초점을 비껴 그 옆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전날의 마물 토벌을 이르는 말임을 알기에 다소 날카로워지는 어투는 어쩔 수가 없다. 얀에게 그것은 생활이었지만 동시에 악몽이기도 했다.

  "너도 안 다쳤고. 보통 두세명씩 간다면서." 

 그래서 쉬웠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물론 루시아의 말엔 악의는커녕 다른 아무 감정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얀은 잘 알고 있었다. 아는 것과 반응하는 것이 다를 뿐이지. 특히나 저에게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냥 멋모르는 마법반 학생이 아니라 루시아라면 더더욱. 얀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 내가 베테랑이어서 그런 게 9할정도? 부러 밝게 말하지만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한참을 묵묵히 걷는다.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다른 사람이 아닌 루시아였기 때문에 얀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는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결국 주제에서 한참을 벗어난 후에야 작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거진 몇 시간이 지난 이야기였기에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루시아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뭐라는 거야. 배고파, 먹을 거 줘. 너는 그런 걸 왜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말하냐, 너 뭐가 예쁘다고? 

  -너도 예쁘다고 했잖아? 

 픽 웃어보이며 어쩔 거냐는 눈으로 얀을 마주보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진다. 안그래도 홍조가 있는 얼굴이 붉게 올라서는 부정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그야 블레이크 너는 확실히 미인이니까... 작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얀이 웃겨 죽겠다는 듯 잔뜩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도 있었다. 그래, 블레이크가 자주 하던 행동들이었다. 이게 너네 간식이야? 밥이거든. 밥이라고? 하나같이 다 말라비틀어졌네. 육포를 하나 우물거리며 말하다가 생각보다 맛이 있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 또한. 
 블레이크는 얀이 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음엔 나도 데려가. 다시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가서, 다짜고짜 하는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의 얀이 대문 쪽으로 블레이크를 죽 밀었다. 귀족은 귀족답게 하던 일이나 해, 저 산에서 죽었으면 그거 수색하는 것도 우리들인데 사람 번거롭게 하지 말고.  

  -내가 저기서 왜 죽어? 

 짜증스럽게 반박한 블레이크는 아마도 산을 내려와 저택 앞에 다다른 순간 말하려고 결심했을 제안을 툭 뱉고 사라졌다. 소등하고 나올 수 있지, 얀 판 베트레이? 정원 문 열어놓을 테니까 열한시에 와. 내가 왜 그래야 하냐는 얀의 말에는 말하던 내내 알 수 있었던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깔깔거리며 손을 흔들어주기만 했다. 블레이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밤에 정말로 얀이 기숙사 배관을 타고 내려와 조심스럽게 제 집 정원 문을 밀고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궁금했거든, 학원 애들은 모두 군인이라면서. 아무리 봐도 내 또래잖아, 너는. 수도 치안을 담당한다는 게 안 믿기네. 

 자신이 베어먹던 사과를 자연스레 툭 건내주며 말한 블레이크가 얀을 보았다.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듯 작게 웃음짓는 눈을 마주본다. 그리고 그 순간 얀은 알았다. 자신은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블레이크가 허락하는 한 언제까지나 소등 시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둘은 그 여름이 가을로 변할 때까지, 첫눈이 올 준비를 하듯 잎새를 다 떨어트린 나무가 딱딱하게 굳어질 때까지도 거의 매일을 만났다. 얀은 이야기를 했고, 블레이크는 제 할 말을 사이사이에 툭툭 끼워넣으면서도 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원의 이야기는 어느순간부터 얀의 이야기로 변했다가, 그 이후에는 그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들을 이야기는 끝났을 텐데도 블레이크는 그만 오라는 소리를 않았다. 얀은 안도했고, 그랬기에 감히 착각을 해 버린 것일 뿐이다. 상대방도 조금은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 

 블레이크를 머릿속에서 몰아낸다. 다 지난 일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잊겠다는데 혼자서 기억들을 붙잡고 있는 것은 비참하기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아예 통째로 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왜 눈 앞의 사람은 그걸 이리도 방해하는지, 기어이 팔을 잡아 끌어 그때로 데려가 묶어두는지 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망 생기게 하지 마, 부탁이야. 전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할 수 없는 미련을 말한다.  

  "아마디스." 

 야영지를 찾아 모닥불을 피우고 한 숨을 돌린 후였다. 봉우리 다섯 개를 넘은 건 기념할 만한 일이었다. 이 속도라면 내일은 임무에 대한 상세 정보를 받을 마을에 도착하리라. 어둠이 내려앉는 풀숲을 보고 있다가, 왜 부르냐는 듯 시선을 두고 있는 루시아를 뒤늦게 알아차린 얀이 아, 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받은 임무가 뭐야?"
  "그런 건 비밀이지."
  "깐깐하기는..."

 이걸 물으려던 게 아닌데. 슬쩍 표정을 살피던 눈이 이내 내리깔린다. 타닥거리는 불꽃이 작은 조각을 위로 피어올렸다가 아래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몇 명 죽였어?"

 예고없이 툭 떨어진 고저없는 말소리에 얀이 일순 숨을 멈추었다. 다시 내쉰다. 쫄기는. 말 좀 잘못 들은 것 가지고.

  "마물은 명으로 안 세, 아마디스. 글쎄 지금까지 세자리수는 될 걸."
  "아닌 거 알잖아."

 얀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정말 너답지 않아, 블레이크. 속으로 짓씹듯 뱉어버리는 말이 저에게 한 것이 아님에도 심장을 쥐어짠다. 끝낼 거였으면 깔끔하게 그랬어야지. 루시아를 보며 완연히 블레이크에 대한 생각을 한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바로 얀 자신이 블레이크에게 했던 말들이므로.

  "너랑은 상관없다며?"
  "그냥, 저런 마물 때문에 죽다니 좀 불쌍해져서."

 명백하게도 속을 긁어내는 말이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얀은 확신했다. 두 명이 아닌데 두 사람이 기를 쓰고 뾰족하게 가슴 어딘가를 찔러대는 기분이다. 루시아가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이야기를 꺼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너는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돼."

 기계마냥 낮에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너는 안 돼.

  "그냥, 전해듣기만 했지 잘 몰라서."
  "거짓말 하지 마."
  "정말로 말해줬다니까."

 얀이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사람 정을 다 떨어지게 만드는 게 목표인 것이 분명하다. 침착해, 속이 뻔히 보이잖아.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아니, 너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만해, 아마디스."

 그 말을 끝으로 얀이 먼저 누워버렸다. 잘 참았어. 주먹질은 나쁜 거다. 부질없는 생각들을 하며 몸을 틀어 등돌렸다. 빨리 자면 된다. 그러면 돼. 내일은 마을에 도착할 테고, 조만간에 이 일도 끝이었다. 
 아, 젠장. 내 담요는 왜 자연스럽게 쟤가 들고 있는 거야. 얀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블레이크와의 만남이 끊기는 것이 두려운 와중에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꺼내들기엔 꺼려졌던 말이 있었다. 간결하게 치뤄지는 교내 장례식이 있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적어도 한 달에 두어명은 마물 토벌에서 죽곤 했고, 마나를 다루는 군사학원 학생들의 특성상 시신은 따로 처리되어 정작 한 달에 몰아서 하는 장례식에는 목에 걸고 다니는 인식표만이 남았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직 학생이다. 별다른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표는 추모 게시판에 걸린다. 수도없이 많기에 누군가를 찾기 위해 그 앞에 가는 사람은 이제 몇 명도 되지 않았다. 똑같이 그 게시판에 걸리거나, 혹은 그 기억들에 붙잡히지 않으려 외면해버리거나. 얀은 후자였다.

  "이야기 들었어, 학원 장례식엔 목걸이만 있다면서?"

 언제나처럼 블레이크는 제가 할 말을 별 배려 없이 던져놓는다. 얀이 답을 알려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럼 시체는?
얀 또한 그 죽음을 수없이 목도했을 것임을 알고 있겠지만 블레이크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얀도 그 사실에 상처받기에는 무뎌질대로 갈려나간 후였기 때문에 잠시 망설일 뿐 이내 제가 답을 내놓을 것을 안다.

  "...마물을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블레이크. 숙주인 동물에게는 마법회로도 없고 애초에 마나는 에너지일 뿐 사고하는 생명체가 아니니까."

 그냥 좀 센 동물일 뿐이지.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던 얀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마나에 오염된 상태를 마물이라고 부른다고 했잖아. 그 말은 마나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뜻이고. 전에 말했지, 마나를 쓴다는 건 대기중의 마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뜻해."

 파삭, 얀의 손 끝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푸른 색. 마나를 뜻하는.

  "나같이 후천적으로 개발한 사람들은 그 통제력이 약해. 똑같이 마법회로지만 심장을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길어봐야 팔까지가 한계니까. 그리고 전투반 학생들은 모두 똑같아. 블레이크, 정맥 주사로 수액을 맞는데 거기로 독약이 들어오면 어떨 것 같아?"
  "죽지 않아?"

 즉답을 내놓고는 더 말해보라는 듯 턱을 괴었던 블레이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똑같이 당한다는 거야?"
  "비슷하네. 독이 들어왔는데 그걸 자기 걸로 바꿀 힘이 없으면 온 몸으로 퍼지겠지."
  "똑바로 말해."

 팔을 내렸다. 바로 옆에 놓인 블레이크의 손을 곁눈질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대신 주머니에 갖다 넣었다.

  "인간이 마물이 된 적은 없어. 그렇게 돼서는 안 되니까."

 얀이 잘라 말했다. 입을 다물었다가, 침을 삼키곤 짧게 덧붙였다.

  "왜 한번에 두세명이 같이 가는지 알겠어?"
  "...거짓말이지?"
  "우린 군인이야, 블레이크."

 마나에 잠식된 몸은 생명이 다함과 동시에 바스러진다. 추모 게시판에는 인식표만이 걸렸다. 은빛의 얇은 양철판은 수없이 많아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 그 곳에 가는 사람은 이제 없다. 똑같이 그 곳에 걸리거나, 잊으려 노력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우들이 내리는 결정은 희생자에게 어떤 의미로는 자비였으나 감사를 원하기에는 잔혹했다. 얀이 눈을 감았다.
 얀이 벤 마물의 수는 세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숨통을 끊고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푸른 연기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익숙하다. 텅 빈 자리에서 검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채 반짝이는 인식표를 주워들고 품 속에 갈무리하는 것 또한.
 이제는 익숙했다.


**


 다음날은 내내 말이 없었다. 얀이 생각하기에 루시아는 그런 눈치를 볼 인물이 절대 아니었지만 왠일인지 그는 조용했다. 소비한 마나를 다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는 건 다행이었다. 루시아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건 당연하게도 그와 관련되어 있을 터였으니. 얀 또한 뻐근한 몸이 다 나았다고 느껴진 것이 오래 전이었다. 이대로 산을 넘어서면 바로 국경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 있을 테고, 그 다음날엔 국경을 넘을 것이다. 첫 날의 일을 제외한다면 순조롭기 그지없다고 얀은 생각했다. 졸업하고 같은 부대에 배치되는 거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루시아와 다시 볼 일도 극히 드물어질 것이었다. 학원에서는 피하려고 그리 애를 써도 매번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이제는 정말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정보를 받기로 되어있던 마을은 생각보다 컸다. 이스탄 쪽의 국경에 밀접해 있어서일까, 마찬가지로 변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제 고향과 무심코 비교하던 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어도 여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질 걱정은 않아도 될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이스탄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1차로 대피해야 할 곳이 되겠지만.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는 일반적으로 사제와 함께 병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 도시가 아닌 이상 그 건물이 마을의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갔다올게, 짧게 말한 얀이 짐을 내려두곤 방을 나섰다. 손님이 많을 지역은 아니었는지 여관은 손이 많이 가지 않은 티가 났다. 새 건물 그대로 폭삭 삭아버렸다고 하면 맞을까. 삐걱대는 소리가 영 거슬리는지 침대를 툭툭 차고 있던 루시아는 고개도 까딱하지 않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얀도 통보하듯 툭 내뱉고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임무 중이니까 실명은 안 쓰는 게 좋아. 슬쩍 말한 얀에게 피식 웃어보인 루시아는 여관의 카운터에 그리 말했더랬다. 블레이크요.
 굳이 따지자면 보통 여자아이에게 짓는 루시아라는 이름이 더 어색할 것이기에 올바른 선택이긴 했다. 얀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즐기는 건지 덧붙인다. 아, 쟤 이름은 빙고에요. 열쇠를 가지고서 나르듯 저를 지나쳐 올라가는 모습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봤자 루시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루시아가 누구야? 얀이 물었을 때 블레이크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크게 시선을 주었다. 손수건에 수놓아져 있던데, 어제 준 거 말이야. 문제의 그 손수건이 접혀있는 제 윗주머니를 톡톡 두드리며 얀이 물었다. 전에 말했던 너네 첫째 누나? 잠시 얀을 빤히 보던 블레이크가 한숨을 폭 쉬었다. 거기 그렇게 박혀 있었어?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내 건줄 알았는데 잘못 들고 나왔나보네. 대수롭지 않은 투다. 둘째 누나일까. 절대 아닐 것 같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블레이크의 것이 아니라면 받았다고 한들 그리 의미둘 이유가 없었다. 돌려줄까, 하는 말에 블레이크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가져. 너 준 거니까.
 얀은 매번 저택 입구에서 제 위치가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썼다. 누가 나오기라도 하면 어떡해, 걱정스레 묻는 얀과는 달리 블레이크는 태연하다. 어차피 내 집인데 누가 쫒아내? 아니 네 문제가 아니잖아!

  -괜찮아, 고용인들은 밤에 못 나와.

 첫째, 그러니까 나이로 치자면 얀에겐 누나가 되겠다. 그 사람은 수도에 잘 있지 않는다고 했다. 너처럼 군인이거든. 블레이크가 틱 던졌다. 둘째도 마찬가지. 이쪽은 군대 사람은 아니지만. 오빠 하나 있는 건 맨 윗사람이랑 같이 다녔어. 짧은 소개였다. 블레이크는 가족 일을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교묘하게 잘라내는 걸 보자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원에 나와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지. 너 생각보다 겁이 많네? 말하고는 깔깔거린다. 발끈하기에는 다분히 장난인 것을 알아서, 얀은 그냥 그래도...하는 작은 소리로 제 입장을 대신하고는 말았다. 야, 나 졸려. 이제 가. 등을 떠미는 것 또한 장난스럽다. 잘 자, 블레이크. 잠시 머뭇거리던 얀이 팔을 벌린다. 상대방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슬쩍 그 몸을 끌어안았다가, 마찬가지로 뭐라고 하기 전에 빠르게 떨어져 정원의 담장을 휙 넘어버렸다. 한순간 꽃이 피듯 퍼져온 향이 온전히 블레이크라는 생각에 돌아가는 내내 웃음꽃이 피었다. 졸업을 하고, 여전히 만약에라는 말이 붙고 나서야 성립할 수 있는 상상이었지만 그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멀리 임무를 나간다면 블레이크에게 그런 편지 혹은 전보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연락은 승전으로 할게. 사랑해. 하고. 

 루시아로 시작된 생각이 어느새 그까지 뻗어갔다. 고개를 젓는다. 그 밤의 웃던 얼굴과 똑같이 생긴 모습을 매일 보고 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얀은 그게 너무 불편했고, 그래서 학원에서는 루시아의 얼굴 한번을 피해보려 발버둥쳐왔다. 부질없는 노력이었지만.
전보는 전날 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첫 날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 늦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감안한다면 굉장히 빨리 온 편이었고, 계획에 차질이 있을 리도 없다. 건물을 나오며 암호화되어 전해져온 통신을 펼쳐본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니, 담당 마법사의 말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옮겨 적어주기만 하면 되지 왜 굳이 내용을 궁금해하고 그러시나. 고향마을과 마찬가지로 오지랖들은 넓다고 생각하며 여관 입구 벽에 기대서 내용을 읽는다. 

 꾸깃하게 구겨진 종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울 생각도 못한 채 얀이 숨을 크게 들이쉰다. 방금 내가 뭘 읽은 걸까. 혼란한 가운데 드는 생각은 여러 가지였으나 정작 실행에 옮긴 것은 하나였다.
 왔던 길을 그대로 옮겨 마을의 중심되는 건물으로 달리는 걸음이 다급했다.

 통신을 맡은 마법사가 궁금해했던 내용은 이러했다.
 이 전보를 받은 다음 날 밤에 지정인물을 사살하고 귀환할 것.


**


 얀이 방을 나가자마자 루시아는 침대를 툭툭 차던 행동을 멈추었다. 별로 이상한 것도 못 느꼈겠지. 루시아가 생각하는 얀은 세상에서 제일 눈치가 없었다. 감도 없고, 센스도 없고. 저런 애가 학원에선 인정받는 인재라니 루시아는 여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인재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인 것 같은데.

 해가 지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밤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첫날 짐을 얀에게 맡겼을 때부터 주머니에 쑤셔박혀 있던 종이를 끄집어냈다. 다시 펼쳐 본다고 내용이 달라져 있을 리는 없다. 사실 적어서 줄 필요도 전혀 없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라만드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손 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종이를 재로 날렸다. 원소 마법이라는 것도 그냥 갖다붙인 이름이지, 멍청하게 정령 이름이랍시고 소리를 내어 부르는 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방출한 마나에 색깔을 입히는 것에 불과했다. 불이라면, 똑같이 대기 중의 산소를 끌어와 마나와 그 마나의 에너지를 촉매로 한순간 터트리는 것 뿐 정말로 불의 정령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훌륭한 눈속임이다.
 광역 마법은 그런 거였다. 자신의 마나로 주변의 마나를 동조시켜 거대한 재앙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진창에 빠져들었던 그 마물처럼, 그 시체를 태웠던 불꽃처럼. 그리고 지금은 그 재앙을 보여주러 갈 때다. 그 마을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무심하게 얀의 침대 위를 건너다보던 루시아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엉망으로 펼쳐놓은 짐들의 가운데에서 손수건을 집어든다. 돌려준다 할 때는 언제고 이런 걸 가지고 다니나. 레이스가 달린 고급스러운 재질의 손수건은 남루한 짐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였다. 루시아 아마디스. 사용하는 것이 아닌지 주인과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채로 곱게 접혀 있는 천 위의 이름자수를 쓸어보았다가 제 주머니에 넣었다.
 방의 문이 닫혔다.


**


 미안한 표정은 짓지 않으리라고 블레이크는 다짐했다. 못내 쓰린 가슴에 할 말을 찾지 못한 목이 숨을 못 쉴 정도로 막혀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야?"

 얀 또한 그럴 것이다. 슬퍼하는 표정따위는 짓고 싶지 않았을 테다. 이미 그의 말 끝에서부터 눈물이 보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가리려 노력하는 그대로 봐 줄 작정이었다. 블레이크 자신이 얀에게 항상 말했던 것을 이제는 제가 반복할 참이었다. 센스없고, 감도 없고, 눈치도 없는 그 모습을.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끼긱대며 말라오는 입에서는 신기하게도 평소와 같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온다. 블레이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

 그 이름만을 불렀다. 뭐라고 다른 말을 해 봐. 이름만 불러놓고서 놓아버리지 말란 말이야. 스스로 떠올리는 생각에 질려 입술을 깨문다. 무슨 소리야, 블레이크 아마디스. 스스로에게 윽박질렀다.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은 하지도 말았어야지. 시작은 안 그랬어. 하지만 이렇게 될 걸 알았잖아. 몰랐어. 거짓말 하지 마. 아니야.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런 자문자답은 앞에 있는 얀이 제 앞에서 긴장할 때에나 하는 것일 텐데. 꼴사납게도 그간 조금은 닮아버린 모양이었다.

 나 결혼해. 이제 안 와도 돼. 간결했다. 그날의 처음이자, 지금까지 보내온 날들의 마지막을 통보하는 말이었다. 시작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블레이크의 말로써 모든 것은 결정되고 정리된다. 왜 놀라, 나같은 귀족집 아가씨가 천년만년 이렇게 있을 줄 알았어? 준비해둔 시나리오대로 말을 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얀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그러했듯이. 그것이 블레이크는 서글펐지만 왜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얀의 시선이 가시질 않는다. 항상 손을 잡아도 될까 고민하던 건 얀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블레이크가 그 빈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다 보였어. 손을 잡아도 될까. 뺨을 만져도 될까. 안아봐도 될까. 얀은 생각을 숨기는 걸 잘 하지 못했다. 사람을 가리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블레이크는 그리 알았다. 재미있기도 했고 간지럽기도 해서 그냥 모르는 척 해왔을 뿐이다. 그에 대한 사과는 않기로 했다. 

  "도망가자."

 얀이 그 빈 손을 뻗어 잡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할 말을 찾는 듯 작게 벌어진 블레이크의 입술이 한참을 굳는다. 한발자국 다가온 얀이 재차 말한다. 나랑 도망치자, 블레이크.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 것 그대로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뒤돌아 갈 그를 상상했지 이 상황은 가능성에라도 넣어본 일이 없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까지도 믿고싶어지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무른가봐. 속으로 비웃다가 그것이 자신의 진심인 것을 알았을 때는 그만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놓아버리지 말라고 말했잖아. 이런 걸 바란 거 아니였어? 블레이크. 스스로에게 묻는 말은 힘겹게 부정당했다. 그러게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스스로에게 타박을 준다. 결국 한바탕의 침묵 후에 다시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검날만이 달려 있다. 쥔 사람도, 찔리는 사람도 피를 흘렸다.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얀 판 베트레이? 네가 나한테 뭐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지 마."

 잡은 손을 떼어낸다. 블레이크가 등을 돌렸다. 마지막엔 그 뒤 돌담만을 보았지, 돌아서서 얼굴을 한번만 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춰서진 않았다. 얀은 오늘도 저택의 입구를 볼 수도 그쪽에서 보일 수도 없는 곳에 서 있다. 문을 연다. 그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으리라. 왜인지 어리는 눈가의 물기를 지우기 위해 손수건을 찾았지만 이미 그것은 블레이크의 손을 떠난 물건이었다.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주저앉았다. 이제는 익숙한 치맛자락이 잘못 깔렸는지 다시 일어서다가 한번을 더 미끌렸다.
소리를 지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무얼 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한 것을 풀어내듯 숨이 넘어가는 비명이었다. 고요한 저택을 울리는 소리에도 마주한 풍경은 변하는 것이 없었다. 저택에는 아무도 없다. 원래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창 밖으로 그 해의 첫 눈이 내렸다. 좀 특별한 의미야. 얀이 말한 적이 있었다. 왜, 서민들 눈엔 좀 신기해 보이나보지. 괜히 꼬듯 나가는 블레이크의 말에 얀은 웃었다. 수도 온 날에 눈이 왔거든. 첫 눈이었대. 신기하지, 나중에 조교님한테서 들은 건데 학원 입학날에 눈 내린 건 처음이래. 입학식 한번 힘들었겠네. 저거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잖아. 블레이크 넌 낭만도 없어? 이어지듯 떠오르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군사학원의 입학식은 초겨울이었다. 겨울에 상급생들은 장기간의 훈련을 떠났고, 신입생밖에 남지 않은 학원은 추운 겨울동안 그들이 지식을 쌓고 봄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그리고 첫 눈이 내린다. 모든 걸 덮어버릴 듯 펑펑 내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상보다 빨랐다. 아마도 오늘이 여지껏 지나온 다른 날들과 같았다면 얀은 겨울 내내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블레이크에게 전했을 테고, 아쉬움 섞인 포옹 후에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선 손을 흔들며 정원을 나섰을 것이다.
 학원의 입학식은 내일이었다. 달력에 표시하지도, 날짜를 외우지도 않았지만 블레이크는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그리 주저앉아 있었을까, 바닥에 닿은 다리가 시리다못해 감각을 잃을 때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데리러 왔다."

 블레이크는 돌아보지 않았다. 말대로 귀족집 아가씨마냥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미동도 않는 뒷모습에 대고 목소리는 제 할 말을 끝마친다.

  "짐 챙겨서 나오도록."

 눈발이 창문을 다 덮을 정도로 거세졌다. 그걸 더 보고있는 것도 우스워 시선을 거둔다. 봄이 지났고, 여름과 가을도 그리 지나갔다. 이제는 기나긴 겨울만이 남았다.


**


 임무 파일을 건네주며 담당자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2년동안 고생했다. 루시아가 묻는다. 죽을 준비 하느라 고생했다는 건가요? 빙긋 웃어보이는 표정을 잠시 보다가 대답한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

  -파트너로 왜 얀 군을 지목했는지 알고 싶네.

 글쎄, 별 뜻 없어요. 걔가 전투반에서 제일 잘 한다면서요. 칼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파일을 흝어보던 루시아가 덧붙였다. 덜 아플까 해서.

  -확실히 조건에도 제일 적합한 사람이긴 하지.

 나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는 모양은 처음 봤을 때나 마지막인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여자애 이름이군. 처음 이름을 말한 날 한 말도 기억이 났다.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요? 하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더랬다. 군이 정한 이름에 내가 토달 필요는 없지.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없는 사람이었다. 헛웃음을 지은 루시아가 문을 연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거죠, 이거? 잔뜩 비꼬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받은 임무는 너무나도 예상 그대로여서 루시아는 긴장했던 제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정 마을을 전파하라. 간단했다. 하나를 빼먹었네. 그 이후 사망. 부러 추가해서 적지는 않기로 한다. 마법사 목숨 하나라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루시아가 맡을 임무는 이스탄과 미시의 전쟁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었다. 광기에 휩싸여 국경지의 마을 하나를 싸그리 불태워버린 마법사와, 같은 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위하여 그 마법사를 처단할 정의로운 군인 하나. 효율적으로 추려진 배역들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선량한 시민이 일반적으로 학살당한 데에 분노한 여론은 그 마법사의 잘못을 따지며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정의라고 말하면서, 타당한 명분을 가지고 선전포고를 하려는 순간에는 그 마법사를 벌한 사람이 해당 국가의 군인이라는 것도 불거저 나올 테다. 그 마법사의 잘못이고 상대 국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여론 또한 나올 테지, 정의는 바래고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분노한 여론은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들끓는다. 결국 시작된 전쟁을 마주했을 때 미시왕국은 냉큼 그 선전포고를 받고는 그리 말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저 쪽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라고.

 마법사의 나라는 미시왕국이었고, 변방의 가엾은 마을은 이스탄의 것이었다. 미친 마법사는 루시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를 벨 군인 역시 이 곳에 있다. 2년 내내 이 일을 위해 배웠다. 같잖은 마법회로의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주변 마나를 자극시켜 큰 폭발을 만들어낸다. 필요한 게 한 번이니 당연하게도 일회용 마법이었다. 딱 한 번 피워낼 그 지옥불을 보며 원없이 웃어주면 되리라. 스스로의 죽음을 목도하며 정말로 미쳐버린 것처럼.  

 국경의 구분은 뚜렷하지 않았다. 정말로 옆 마을 수준이군. 루시아가 중얼거린다. 달이 떴다. 이제 밤이다. 그 멍청이가 제 시간에 와야 할 텐데. 일에 대해서는 어쨌든 확실한 사람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얀은 정말로 눈치가 없었다. 그녀석은 평생 모를 거야. 루시아는 항상 생각했다. 어쩜 저리도 얼빵한 것인지. 물론 루시아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가끔은 섭섭하기까지 할 지경이라 일부러 말 사이사이마다 그런 기색을 끼워넣었다. 신경을 긁는 말들도 여과없이 나가곤 했다. 그래도 얀은 모르는 눈치였다. 포기한지 오래지만 묘한 바람은 남았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다. 이젠 정말로 의미가 없다.
 맨날 졸업 졸업 노래를 부르던 그를 루시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 졸업할 때까지 볼 수 있을까? 묻는 얼굴에 대고 글쎄,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마법사를 벨 사람은 미시 군대에 정식으로 소속이 되어있어야 했으므로 얀의 졸업절차는 그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끝이 났을 것이다. 이걸 좋아해야 할까, 베트레이. 난 정말로 네가 졸업하는 순간까지 너와 함께 있었어.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였다.

 루시아가 마을 쪽으로 곧게 팔을 뻗었다. 마나가 온 몸을 역류하는 감각은 연습할 적에도 불쾌했다.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야. 제 손을 떠난 마나가 미리 재었던 좌표 그대로 얇게 퍼져나가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온 몸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마을 하나는 너무 크다. 이를 위한 2년이었음에도 여전히 버거웠다. 그럼에도 시작을 속삭인다. 웃기지도 않아. 누가 쓴 대본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극을 시작할까. 

  "살라만드라!"

 고요한, 밤이 시작된 마을에 재앙의 소리가 울렸다. 아우성이 새어나올 새도 없다. 굉음이 울리며 땅의 기반이 되었던 돌에서도, 나무에서도, 그저 허공에서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붉디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이라 느낀 것은 찰나이다. 쏟아져내리는 화살비가 되어서, 솟구치는 섬광이 되어 옆으로 옮겨붙는다. 쾅,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마을 한곳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뒤이어 화답하듯 크게 터지며 흩어지는 잔해들이 이어진다. 근방의 마나는 전부 연소할 것이다. 옮겨 붙으며 죽음을 내리리라. 두어번의 폭발과, 녹아내리는 지반, 그리고 그 속에서 먹혀가는 비명들. 불자락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씹으며 몸집을 불려간다. 방출이 끝난 후는 오히려 고요했다. 불길 속에서 죽어갈 사람들의 절규는 그 너머의 루시아에게 닿지 않았다.
 손을 내린다. 이제는 서있기도 힘든 몸을 부여잡고는 쓰러져내렸다. 그래도 살고싶은가 보지,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켜는 걸 보면. 이상하리만치 주변의 소리에 무뎌졌던 귀가 작은 발소리를 잡아냈다. 인기척이었다. 루시아의 뒤에 바로 섰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래, 네가 왔구나.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온통 붉은 시선을 가리려 눈을 감았다.

 끝이구나.

 문득, 이제는 흐릿해져만 가는 어느날의 기억에서처럼 뒤돌아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초인종이 울리며 손님을 알린 것은 한낮의 무더위가 가신 오후였다. 옷가지에 자수를 놓던 마리아나가 문의 구멍으로 바깥을 확인했다. 옷을 사러 온 사람들일까, 오늘은 휴무라고 걸어두었는데. 혹시나 편지 배달일지도 모른다. 남편과 이혼한 후 마리아나에게 남은 유일한 낙은 수도로 간 아들에게서 매달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누구세요?"

 군인 차림을 한 사람이 두 명.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마리아나가 문을 열었다.

  "얀 판 베트레이 중령의 어머니 되십니까?"
  "내 아들의 이름은 맞지만, 그 애는 아직 학생이랍니다."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열었지만 먼저 말을 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끊긴 말을 이어 가만히 서 있던 사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임무 수행 도중 사망했습니다. 내미는 것은 유골함이 아니었다. 엄마, 여기는 장례식에 시신이 없어요. 편지의 내용이 떠오른다. 얀 판 베트레이. 인식표에 음각된 이름이 낮설었다. 받아든다. 핏자국 하나 없이 반짝이는 줄이 몇 년을 그 목에 걸려 있었을지, 마리아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드님의 유언은 어머니를 수도로 데려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짐을 챙겨달라는 소리를 하고서 두 사람은 떠났다. 추스릴 시간을 주겠다는 걸까. 마리아나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꼭 부여잡은 인식표가 피부를 파고들어 자국이 남았다. 이걸 말하는 거였니. 그녀의 아들은 제 어미에게만큼은 항상 솔직했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지만 마리아나는 그리 대답했다. 뭐든 네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고, 결정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나는 내 아들이 주관없는 겁쟁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단다.
 그랬기에 마리아나는 아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 말을, 언제나 그랬듯 잘 지켜 커준 아들의 행동이 대견하기보다는 가슴아팠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아들의 인식표를 목에 걸고 일어섰다. 여러 번 읽은 듯 벌써 봉인 부분이 너덜해진 전보를 벽난로에 던져넣는다. 바로 전날에 이스탄과 미시의 국경지역에서 날아온 전보를, 수없이 펼쳤을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던 상실이 이제서야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들의, 아마도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마지막 안부가 재로 화하는 것을 지켜보다 일어선다. 6년을 보지 못하고 기다렸는데 더 길어진다고 뭐가 대수일까.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마리아나는 한켠에서 아들이 언제나처럼 언젠가를 말하며 돌아올 것을 믿기로 했다.


** 


 아마디스는 미시 건국 당시 왕을 도와 주변 부족들을 합락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이었다. 대대로 우수한 투사와 모사를 배출하고, 왕의 왼팔로서 절대군주제를 강화해왔던 아마디스의 몰락은, 마찬가지로 왕의 왼팔이었다는 사실에서 시발한 참사였다. 국경 근처 군대의 참모로 파견된 루시아의 아버지는 사고였다는 말과 함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가족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선명하게 남은 칼자국은 그 시신을 보는 아마디스 가의 사람들에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왕권에 도전하는 자 모두 이 꼴을 면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오해이고 음해라는 것을 말하기에 아버지가 사라진 집안에서 어머니의 발언권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의 아이들이 똑같은 결말을 맞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루시아."

 지방으로 발령받았던 장녀 리첼이 거실로 들어섰다. 승전에 대한 보상으로 온 휴가일 테지. 아무리 변방의 소규모 전투였다지만 미시에게는 하나하나 의미있는 전쟁이었을 텐데, 개선 영웅인 그녀는 왕가에 밉보인 제 가문의 위치 때문에 환대받지 못했다.

  "집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쇼파에 기대어 책을 넘기던, 루시아라 불린 긴 머리 소년이 인상을 쓴다. 들을 고용인도 없다. 한때 초대받는 것 자체가 명예였던 아마디스의 응접실은 문이 열려본 지도 오래되었다. 관리도 힘든 저택의 구석구석에는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요리사와 시녀 두어명 정도만이 낮에 일을 봐주고는 저들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루시아에게는 하루하루가 무료함의 연속이었다. 이야기를 나눌 또래같은 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고 밖을 나돌아다니는 것도 적성이 아니었으나 그런 불필요한 것들이 선택이 아니라 강요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다르다. 다음 달이면 차녀인 미쉘도 산 너머의 마을에 사제로서 발령을 받을 터였다. 전쟁과 전혀 무관한 지역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 말은 곧 이 넓기만 한 저택에 남는 것은 그 하나 뿐임을 의미했다.

  "그래, 블레이크. 잘 지냈어?"
  "누나보단 잘 지냈겠지."

 잠시 싸한 정적이 흘렀다. 제 동생의, 쇼파 위로 나온 둥근 머리통을 물끄러미 보던 리첼이 간소한 짐을 제가 섰던 자리에 내려두고는 다가섰다. 몸은 어때. 

  "내가 환자도 아니고 매번 안 물어도 돼. 말대로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않고 있으니까 그것도 안 물어도 돼."

 읽기는 하는 것인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다음 책장이 넘어간다. 동생이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았으나 그저 입을 다물었다. 리첼과 루시아의 어머니는 항상 이것이 잘 하고 있는 행동인지를 걱정해왔다.

  "싸우지들 말고, 과일 준비했으니까 언니도 빨리 짐 풀고 와!"

 눈치를 보던 미쉘이 슬쩍 둘 사이로 끼어든다. 블레이크, 나 토끼모양으로 자르는 거 성공했어. 빨리 와서 보라니까? 잔뜩 과장된 말들이 빈 공간을 울렸다.
이렇게 돌아가는 풍경이 바로 2년이 조금 더 된 시절의 아마디스 가였다. 

 그 집의 마지막 자식은 마법인구였다. 그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된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돌아간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귀족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노력을 통해 별을 단 장녀는 가주의 사망 직후 국경 근처의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장남도 마찬가지다. 왕가가 개국공신 집안을 몰아내는 것은 윤리에 맞지 않았지만, 그를 천천히 말려죽이는 것은 여론을 피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에 어머니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내세우며 제 큰딸을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버린 왕이 어린아이라고 어찌 선처를 해 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남자아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정세가 어지러운 탓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출산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 것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

  -블레이크, 앞으로 네 이름은 루시아란다.

 어린 탓일까, 여직 예쁘장하기만 한 아이에게 리본을 달아주며 어머니는 속삭였다. 너를 마법사로 키우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 말한 어머니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례식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숙이는 루시아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 후 몇년 동안은 그랬다. 그러니까, 장남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장남과 같은 부대에 있었던 리첼은 오지 않았다. 형제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것이리라. 작전 중 사망. 짧은 사유와 함께 시신은 화장했다며 유골함을 내미는 사람이 두 명이 아닌 한명이었을 때 알았어야 했다. 군에서 사망하는 경우 찾아오는 사람은 두 명이라는 소리를 들은 바가 있다. 수색 중 전사했습니다. 잔잔한 말이 맺힌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굴면 아마디스는 정말로 멸문할 거야, 도련님."

  뒤이은 말에는, 슬픔에 가득 찬 귀족집 막내딸 시늉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잔뜩 굳히고야 만다. 잡힌 손목을 빼내기에는 잡은 손이 지나치게 억세었다. 루시아가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빡빡하게 굴지 말자고, 지금은 전시고 마법사는 항상 부족해. 마법인구를, 그것도 귀족이 신고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아나?"

  어쩌라고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누이에게 하듯이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루시아가 제일 잘 알았다. 창백하게 질린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은 상대방이 말했다. 마법인구는 귀하니까 지금이라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면 면책이 될 지도 모르지, 너희 가문 전체가 말이야.

  "내가 뭘 하면 되는데요."

 가끔 얼굴을 비추는 리첼과, 매일같이 편지를 써오던 미쉘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래, 그 얼굴이 다였다. 아마디스에, 그리고 루시아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뿐이었다. 뭐든 할 수 있다 말하는 순간에, 가족이 그토록 열심히 숨기며 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은 그 날 루시아 본인의 손으로 인해 스러졌다. 입학식 때 보자고, 루시아 아마디스. 방문자가 돌아섰다.
 그 빌어먹을 이름이 가짜라는 것까지는 모르나 보네. 루시아는 굳이 제 이름이 블레이크라 정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시작이 되었던 이야기였다. 블레이크가 산에 오른 것은 그 날의 일이었다. 실컷 고함이라도 지르면 나아질까. 알지도 못하는 산길을 오르며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어린 마음에, 그냥 모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을까 하고 꿈을 꾸듯 생각해본다. 내가 그리 느낀다면 그렇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미숙하기 짝이 없어 헛웃음이 지어지는 사고였다. 떨어지던 빗방울이 빗줄기가 되고, 온 몸을 푹 젖어내리게 만들어 가까스로 근처의 동굴로 들어갔을 때 루시아는 생각했다.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하나씩 사라지는 것들을 자신은 굳이 잡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기에 오래 담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으나 다 착각인 모양이었다. 속에 쌓인 것들이 차올라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감정에 젖어들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동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이내 우습다는 듯 웃었다. 아냐, 죽기는 무슨. 이런 것도 겁내는 주제에.

  "거기 누구 있어?"

 루시아의 목소리가 깊은 동굴 안을 울렸다. 아무도 없어? 왜 아무도 없어? 속으로 울리던 소리를 밖으로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혼자라는 건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살았다.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알지 못했던 아이의 오만이었다. 부르면 누가 와 줄까. 돌아봤던 것도 잠시, 제 몸을 감싸며 기대었다. 알잖아, 아무도 없어.

  "여기서 큰 소리 내면 안 돼."

 눈을 감은 후의 일이었다. 답이 들려온다. 누군가가 루시아의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잡았다. 힘을 주어 돌려세운다. 
 익숙한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 군사학원의 것이다. 시선을 올린다. 여직 젖어들지 않은 선명한 금발을,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 또래의 소년을. 콧잔등에 잔뜩 박힌 주근깨를 너머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했다. 

 그날의 일이었다.


**


 발소리는 멈춰선지 한참이었지만 루시아가 예상했던 행위는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저지른 일을 보고 있을까. 온통 붉게 타오르는 세상을 보며 분노하고 있을까. 루시아가 숨을 멈추었다. 순간순간이 영원인 듯 세상에 상대와 자신만이 남는다. 고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듯이.

  "블레이크."

 속에서 밀어내듯, 멈추었던 숨이 턱하고 내쉬어진다. 언제나 그 이름에 대고 대꾸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아."

 저 이름을 그 입에서 듣는 날이 오다니. 실소했다. 루시아 저 또한 그의 이름을 부른 날이 너무나 오래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눈을 떴다. 문득 루시아는 뒤돌아보고 싶어졌다. 돌아서서, 2년 전의 그 날으로 돌아가 그 손을 다시 마주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겠다고. 네가 그리 말하기를 기다렸다고, 다른 핑계같은 건 대지 않고서 그렇게.
 눈치가 없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너는 알고 있었구나. 블레이크가, 아니 이제는 루시아라고 불린 소년이 몸을 떨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로 돌아보고 싶은데. 얼굴을 봐야 했는데.

 그 모든 생각들이 다음 순간엔 멈추었다. 제 어깨를 끌어안은 사람이 누군지는 아까부터도 잘 알았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잘 들리지 않았다. 멀어지려는 의식을 다잡아 귀를 귀울인다. 이번에는 들었다.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울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제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 상대방의 눈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서, 나오지 않는 말 대신에 모든 대답을 내어주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도망치자.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이번에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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